바람 (시인: 정공채)

배한성

♣  바  람

- 정공채  시

1
내가 바람을 잡아, 바람을 피웠을 때
주위의 사람들은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였지
나의 아버님은
안경을 쓰시고 말았지

내가 캬바레에서 검은 구둣발로 놀아난 날
내가 살롱에서 빨간 술에 담배만 피운 날
숨가쁘게 청춘의 빨간 차표를 손에 들고 있었던 날

나를 위해 기도를 해 주던 당신
당신이 없어서 그럴까
그래서 전원으로 돌아갈 푸른 차표 대신
아직도 나의 손에 빨간 차표를 들고 있는 것은...

2
새가 아침에 지저귀듯이
바람이 현재 나무에 앉았다
꽃이 피었다

내일 아침에도 저 새가 죽지 않으면
새는 또 내일을 울리라 바람도 내일
미래의 나무에 새처럼 앉으면
그 미래의 나무에 꽃이 피리라

기막히게도 과거의 나무에 꽃이 피어있다
까게 타버린 고목에
바람이 앉으니까
기막히게도 과거의 나무에 이 피어있다

3
인생은 바람을 배우는 기각
바람 속에 나서 아이가
바람 속에 어른으로 익어가다가
바람 속에 죽어 가는 기간

요절도 긴 긴 백년도 바람이 주는 자유
인생은 바람을 조금만 마시다
쬐꼬맣게 바람을 습득하다가...

4
질서를 기다리며 영겁을 불어올
바람의 창고는 머언 원시림인가
아직 보지는 안했으나 아득히 계시는 신이랄까
아름다운 장미랑 이름 없는 들꽃도
말없이 조용하게 생성시키는

신이 자물쇠를 열고 보내시는
바람의 무궁한 창고는 어디에 숨어 있을까

5
허무는 없어도 바람은 있으리라
오히려 내 사랑은 죽어가도 바람은 있으리라
당신을 사랑하는 나의 빨간 기억은
어차피 한 세상만 있다가 지워지리라

창세기에 일어났던 바람아
하늘과 파도와 땅이 마르고 닳도록.
자연의 문아
바람을 보내시어 당신과 나의 무덤을 지우고
우리의 쓸쓸한 비문도 지우시고, 그 자리에

바람의 통로가 열려 있으리라
바람의 통로만 열려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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