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은이는 오늘도
아무도 없는 빈집에 홀로 들어왔어.
엄마, 아빠는 회사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계실 거야.
하은이는 5교시 수업을 마치고
한자 방과후 수업을 들은 뒤
영어 학원까지 다녀오는 길이지만
오늘도 집에는 아무도 없어.
하은이는 집에 돌아와
곧장 영어 학원 숙제까지 끝냈지만,
하은이의 숙제를 봐 줄 사람도
하은이에게 간식을 내줄 사람도
집에는 없었어.
하은이는 잠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어.
고요한 집과는 달리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와글와글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반갑게 들려왔어.
하은이는 아침에 아빠에게 받은 돈
삼천 원을 챙겨 들고 놀이터로 나갔어.
놀이터에 나가보니 수많은 아이들 속
같은 반 친구도 보여.
'어, 다운이가 나와 있네.
다운이가 우리 아파트에 살았었나?
왜 저기에 있지..?'
평소에 다운이에게 별로
말을 걸어본 적은 없었지만,
놀이터에서 만났을 땐 어쩐지
자신감이 생기는 것 같아.
하은이는 모래놀이터에 자리를 잡고 앉아
땅을 한참 파고 있는 다운이를 불렀어.
"야, 강다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너 우리 아파트 살아?"
다운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대꾸했어.
"어, 김하은이네. 안녕?
나 원래 여기 살았는데 몰랐어?
심심하면 같이 놀자."
하은이는 며칠 전부터 묻고 싶었던 걸
이때가 기회다 싶어 물어봤어.
"다운아, 근데 너 월요일에
가족신문 발표 때 왜 한마디도 안 했어?
가족신문도 다 만들었던데."
다운이는 화들짝 놀라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어.
"아, 그거. 그냥 안 했어.
나 원래 할 수 있는데, 그냥 안 한 거야."
하은이는 다운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
할 수 있는데 그냥 안 했다니.
이 세상에 그런 게 어딨어.
"할 수 있는데 왜 그냥 안 해?
강다운 너 거짓말이지?!"
다운이는 코가 살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더 이상 발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어.
"아 몰라, 몰라. 우리 술래잡기 하자.
내가 술래야, 김하은! 열세고 시작한다."
다운이는 재빠르게 뛰어가더니
미끄럼틀 기둥을 붙잡고 자리를 잡아
숫자를 세기 시작했어.
“하나, 둘, 셋, 넷.....”
잠시 어리둥절해 있던 하은이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
다운이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뛰어갔어.
술래잡기를 하다 보니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놀이터로 모여들었어.
뒤늦게 몰려든 친구들 덕분에
술래잡기와 정글짐 먼저 올라가기,
그리고 축구와 캐치볼,
얼음땡까지 하고 나서야
하은이는 집으로 향했어.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기 시작했어.
“우리 공주 여태 놀이터에 있었던 거야?
어서 들어와.”
하은이가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어.
“엄마~ 엄마, 나 배고파.”
하은이는 엄마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어.
어제도 그제도 엄마는
세상이 온통 까매지고 나서야 집에 들어왔거든.
그럴 때면 하은이는
시계만 줄곧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아도 되니
지금 하은이 기분은 최고야.
“하은아, 엄마가 돈까스 좀 사 왔어.
얼른 씻고 와서 먹자.”
엄마는 하은이 마음을
어쩜 그렇게 잘 아는지 모르겠어.
오늘은 아침부터 줄곧 돈까스 생각이 났었거든.
하은이는 씻자마자 식탁으로 향했어.
“잘 먹겠습니다!”
하은이는 세상에
오늘만큼 행복한 날이 또 있을까 생각하며
돈까스를 썰기 시작했어.
엄마와 마주 보며 앉아
조잘거리며 식사하는 일은
언제나 최고로 즐겁지.
엄마는 하은이의 말이라면
언제든 귀 기울여 들어주거든.
“하은아 맛있지? 천천히 꼭꼭 씹어 먹어.”
“응 엄마, 최고로 맛있는 저녁밥이야.
나 이거 다 먹으면
돈까스 하나 더 먹을래.”
하은이가 맛있게 저녁밥을 먹는데
엄마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어.
"하은아 아빠 전화네.
엄마 잠깐 통화 좀 하고 올게."
하은이는 집어 들었던 돈까스 조각을 내려놓고
엄마의 통화 소리에 귀를 기울였어.
닫힌 방문 사이로도
엄마가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목소리가 들려.
"그래서 어떻게 해결을 하겠다는 거야?
당신이 매번 나랑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니까
나도 이렇게 밖에 나올 수 없는 거야.
그만해, 그만하라고."
엄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잔뜩 풀이 죽은 하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코에 손을 가져갔어.
엄마 아빠가 싸울 때면
하은이의 오른쪽 콧구멍이 유독
답답하게 막히는 것 같고 간지러워져.
하은이는 오른쪽 콧구멍을 살살 긁어
코딱지를 하나도 남김없이 꺼냈어.
그리고 내려놓은 젓가락 옆에
방금 막 파낸 코딱지를 모아두었어.
코딱지가 별로 많지도 않았는데,
하은이는 계속해서
오른쪽 콧구멍을 긁어내는 일에 집중을 했어.
하은이가 코딱지를 다 긁어내고 나서도
엄마와 아빠의 다툼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어.
하은이는 최고로 맛있는 돈까스를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어.
하은이는 슬프고 속상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 콧구멍을
조금씩 파는 습관이 생겨 버렸어.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가끔씩 아주 가끔씩만 있는 일인 데다
하은이는 조심성이 많은 아이라
하은이의 습관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